합천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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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義湘)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신림(神琳)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목태후(聖穆太后)가 불사(佛事)를 도와 전지(田地) 2,500결(結)을 하사하였다. 순응이 갑자기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法孫)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創寺)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福田: 귀의(歸依)를 받았다는 뜻)이었던 희랑(希朗)이 이곳에서 화엄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寺刊藏經) 중에 화엄 관련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寺宇)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仁粹王妃)와 인혜왕비(仁惠王妃)가 학조(學祖)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寮舍: 사찰의 승려들이 사는 집) 160칸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1695년(숙종 21)에 화재로 여러 요사와 만월당(滿月堂)·원음루(圓音樓)가 불탔으며, 그 이듬해 봄에 또 불이 나서 서쪽 여러 요사와 무설전(無說殿)이 불타버리자 뇌음(雷音)이 중건하였다.
1743년(영조 19)에 또 화재로 인해 큰 축대 아래 수백 칸이 불타 버렸지만,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상성(金尙星)의 도움으로 능운(凌雲)이 중건하였다. 또 1763년에 실수로 불이 났으나 관찰사 김상철(金尙喆)의 협조로 설파(雪坡)가 중건하였으며, 1780년(정조 4)에 불이 나자 5년 만에 성파(惺坡)가 중건하였다.
1817년(순조 17)에 다시 큰불이 나서 수천 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관찰사 김노경(金露敬)의 도움으로 영월(影月)·연월(淵月) 등이 소규모로 중건하였으며, 1871년(고종 8)에 법성료(法性寮)가 다시 불에 탔다. 이와 같이 이 절은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
조선시대의 불교 탄압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元興寺)를 전국의 수사찰(首寺刹)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中法山)을 두었을 때는 영남 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0본산(本山)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