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의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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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령왕릉은 송산리 제6호 벽돌무덤 북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송산리고분군이 조사되면서 무령왕릉이 제6호 벽돌무덤의 현무릉(玄武陵)으로 인식되어 처음에는 왕릉으로 주목되지 않았다. 따라서 왕릉으로 발견된 것도 매우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졌다. 1971년 7월 5일, 제6호 벽돌무덤 내부에 스며드는 유입수를 막기 위하여 후면에 배수를 위한 굴착공을 파면서 왕릉의 입구가 드러나 조사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무령왕릉은 도굴과 같은 인위적 피해는 물론 붕괴 등의 피해가 없이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조사된 것이다. 현재 송산리고분군 내 무령왕릉은 제7호분으로 분류되어 있으나, 피장자가 명확히 확인된 무덤이므로 무령왕릉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구조를 보면 평면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이며, 터널형 천정을 하고 전면의 중앙에 무덤에 들어가는 연도(羨道)가 부설되어 있는 철(凸)자형의 전축(塼築) 단실묘(單室墓)이다. 입지한 지형은 남향한 경사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한다. 원형인 분구(墳丘)의 지름은 약 20m 이며, 무덤의 상면에 호석(護石)으로 추정되는 잡석으로 쌓은 석축도 확인되었다. 현실의 바닥에서 분구의 가장 높은 지점까지는 7.7m였으나, 토압이 현실에 적게 미치도록 분구의 중심을 현실의 중심보다 5.8m 위쪽에 조성하였다. 봉토는 현실 주위의 풍화암반을 편평하게 깎아낸 후 석회를 섞은 흙으로 쌓아 원형으로 만들었다.
묘실 규모는 남북 길이 420㎝, 동서 너비 272㎝, 높이 293㎝이다. 무덤의 현실은 남쪽의 벽면에서 109㎝ 범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보다 21㎝ 정도 한단 높게 하여 왕과 왕비의 합장 관대를 조성하였다. 따라서 후면의 관대는 동서 너비 293㎝, 남북 간 너비 315㎝의 규모이다. 관대와 바닥의 경계는 벽돌쌓기의 차이, 즉 관대와 바닥 전면의 벽돌쌓기는 삿자리문 형태로 장방형의 벽돌을 깔면서 경계에 해당하는 관대 외곽은 벽돌을 길이로 늘어 쌓아 구분하였다. 이 바닥의 벽돌 아래는 묘실에서 연도를 지나 묘도로 빠져나가는 배수시설이 있다.
묘실의 남벽 중앙에 시설된 연도는 길이 290㎝, 너비 104㎝, 높이 145㎝의 규모이고, 그 앞으로 묘도가 길게 연결되어 있다. 묘실의 축소판으로 터널형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사용한 벽돌이나 축조방법도 묘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천정 이하의 벽면에는 반으로 자른 연꽃이 있는 벽돌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 바닥도 묘실처럼 벽돌을 삿자리문으로 깔았으나 묘실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 묘실 내의 관대와 같은 높이를 유지한다.
연도 외부는 묘도로 이어지지만 바깥에 벽돌을 쌓아 304㎝의 높이로 연도 전면의 벽체를 갖추고 있다. 사용된 벽돌은 문양이 있는 것과 문양이 없는 것, 그리고 무령왕릉에 사용된 연꽃무늬가 있는 것 외에도 제6호 벽돌무덤에서 사용된 동전무늬가 있는 전범문(錢范文)의 벽돌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배수구는 현실과 연도의 경계부에서 시작하여 연도의 가운데 바닥 밑에 설치되었으며, 남북으로 187㎝의 길이에 이르게끔 벽돌을 사용하여 구축하였다.
벽체는 벽돌을 이중으로 쌓아 만들었다. 벽면은 좌우 벽을 상부에서 곡률을 주어 정상부에서 만나고, 전·후벽은 수직으로 하여 터널형 천정을 축조하였다. 전축은 뉘어쌓기와 세워쌓기를 반복하여 사평일수(四平一垂) 방식으로 축조되어 중국의 삼평일수(三平一垂)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벽돌쌓기 방법은 네 벽면이 동일하지만 상단부의 좁은 면적이나 둥근 형상이 표현되는 부분은 방법을 달리하였다. 공적법(空積法)을 사용하였으나 벽돌과 벽돌 사이에 간간이 석회나 진흙이 끼어 있으며, 천장에서 벽돌의 이음새는 석회를 발라 견고하게 하였다. 사용된 벽돌은 연꽃무늬가 장식되었으며, 위치에 따라 사격자의 망상문(網狀紋)과 연화문을 다르게 배열하였다.
입구 부분을 제외한 3벽면에는 등잔을 두기 위하여 북벽에 1개, 동·서벽에 2개씩 작은 화염문을 채색한 보주형 벽감과 벽돌 9개를 길게 배열한 살창(유자창)을 시설하였다. 이외에 묘실 벽에는 대형의 철정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고, 묘실 바닥을 1단 높여 관대를 시설하면서 그 아래에 배수로를 설치하였다. 특히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벽돌은 연화문이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입구의 막음벽돌 중에는 무문전과 제6호 벽돌무덤의 벽돌과 동일한 전범문 벽돌이 꽤 많이 있다.
출토유물은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데, 연도 입구에서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誌石) 2매와 오수전 한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발견되었다. 현실의 남쪽에도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쓰러져 있었으며, 관대 위에는 동쪽에 있는 왕의 목관과 서쪽에 있는 왕비의 목관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유물이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부장유물이 출토되었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到 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爀登冠大墓立志如左)”라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하여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중요 장신구로는 왕이 소지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金製冠飾) 1쌍(국보 154호), 금귀걸이[金製耳飾]1쌍(국보 156호), 금제 뒤꽂이[金製釵]1점(국보 159호), 은제과대 외 요패 1벌, 금동식리 1쌍,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와 금은제도자(金銀製刀子) 각 1점, 발받침[足座] 1점(국보 165호) 등과 왕비가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 1쌍(국보 155호), 금귀걸이 2쌍(국보 157호), 금목걸이[金製頸飾]2개(국보 158호), 은팔찌[銀製釧]1쌍(국보 160호), 금팔찌 1쌍, 금은장도자(金銀裝刀子) 2개, 금동식리 1쌍, 베개[頭枕]1점(국보 164호)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지석 2매(국보 163호)과 청동제품으로 신수문경(神獸文鏡)·의자손명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수대문경(獸帶文鏡: 이상 국보 161호) 등의 각종 거울과 청동제 접시형 용기, 청동완, 청동개, 수저, 젓가락, 다리미 등이 있고, 기타 도자제품으로서 등잔이 있다. 이 가운데 1974년 7월 9일에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종목 17건에 이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